인연의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들도 꽃처럼 나무처럼 매년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것일까? 자기를 만나기 두려워 혹은 진실을 직면하기 두려워 어두운 구멍에 머리만 처받고 큰 몸뚱이는 하늘에 대고 있는, 진실은 맥박에 쿵쾅쿵쾅 뛰고 피가 기운차게 돌고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 직면을 피하기 위해 관념의 세계에 의지하는 면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 비롯해서 그것이 더 자연스러워 습관이 되었다는 걸 자각 못하고 그렇게 사는 건 줄을 착각하여 그것만을 되풀아하다 죽으면 어쩌나? 사람마다 기본적인 패턴이 있다.
그 패턴이 반복된다. 늘 다른 상황인데도 그 패턴으로 해석되고 하던 식으로 대응된다. 그러하다보니 삶은 지루하고 똑같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매순간 다르다는 진실을 알기는 알지만 패턴으로, 일괄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현재는 놓쳐지고 과거는 펼쳐진다.
반복되는 꿈! 계속 다른 대상과 목적을 잡아보고 드라마틱한 재미를 추구해 보지만 헛헛함을 피랗 수 없다. 왜? 패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꿈은 꿈일 뿐이다. 그 꿈속이 일이라는 걸 일별하는 일, 이 세상은 이렇게 생겨나는 거구나 삶은 이렇게 엄력의 발전소가 돌아가는 거구나. 나는 현재를 완전 놓치고 있었구나---. 자각하는 것만이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것이다.
송두리째 빼앗겼던 마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보는 일이다.
욕구에 마음을 죄다 빼앗겼었다는 걸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쓸 마음이 없었다는 걸 가슴 치며 후회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의 참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들을 만났다. 그리고 어떤 인연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뜻밖의 행운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인연의 복을 만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좋은 일과 좋은 사람만 만나려면 기다릴 수도 없다. 설사 나쁜 인연을 만났다고 해서 투덜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은 내가 지은 나의 인연의 복을 그대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복은 뿌리는 인연 복이니 부지런히 인연 복을 지으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그만큼 힘들게 하는 인연들은 먼 곳에 있는 것 아니다.
가까운 인연일수록 무심히 대하기 쉽고 공경 심을 놓게 되면 쉽게 상처를 주게 된다. 결국 악연이 되는 것이다.
그대, 복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인연들에게 먼저 복을 지어라. 그것이 씨앗이 되어 자연스럽게 복이 되어 찾아 올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양보와 배려’다. 다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뿐이다. 누군가의 도움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깨달아야 한다.
이를 아는 것이 지혜이면 모르면 무명(無明)이다. 무명으로 인해 탐욕에 눈이 멀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어른들은 탐욕에 젖어 눈 멀고 귀가려 빚어낸 죄업들이 누구보다 많을 것이다. 우리 어른들은 이 빚을 갚기 위해서 40일간 광야를 떠돌며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는 예수님의 삶은 부처님 삶과 비슷한 점이 많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언덕을 올라 사형당한’ 그곳을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제 돌아보면서 과연 부끄럽고 생각하는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을 생각할 때 인연은 쉽게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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