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대한 반감(反感)을 보면서

에세이

언론의 사명감이라 부르짓는 바람에 정작 독자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다. 내 것만 유일하게 옳은 진실이라는 언론들이 서로 부딪치고 갈등할 때 독자들은 곤혹스럽기까지 한다. 언론이 갖는 진리의 배타성은 끊임없이 흑과백의 양자택일적 선택을 강요한다. 이는 독자에 대한 신문의 폭력이다. 마카이벨리는 국민을 위해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국민의 행복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옳은 것을 위해 행동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라고 지적했다. 어차피 신문의 기능이 계도(啓導)와 홍보(弘報)라는 양면성으로 구분되는 바, 이 둘은 어느 한 쪽이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원칙도 없다.
흔히 보도의 생명은 사실에 입각해서 써야 한다. 어떤 의도나 생각, 주장을 갖고 기사를 왜곡되게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언론인이 가져야 할 소양(素養) 중에서 가장 기본이다.
기사가 좋고 나쁨은 독자가 판단하는 것이지 신문사나 기자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문이 독자에게 지고 있는 기본의무는 신문이 서로 똑같아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독자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히 알리는데 있다. 어떤 객관적인 현실을 좋아하거나 또 싫어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자신만의 이득을 따진 주관이여서는 안 된다. 또한 주관적으로 싫어한다 할지라도 그 현실이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
신문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정확히 파악, 고칠 것은 고치고 장려할 것은 장려해야 함이 마땅하건만 이보다 감정적인 면이 먼저 도출되어 마치 앞으로 상종 못할 것이란 생각은 이성적이 아닌 짧은 생각이다.
얼마전 ‘김영란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나서 언론인이 김영란법에 포함돼야 하느냐는 논란에서 많은 사람들이 필자 또는 기자들에게 적대감 표출이 심했다.
민주사회의 한 토대인 언론에 대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가 세금으로 월급 받고 인·허가권을 행사하는 공무원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더니, 어느 분이 ‘당신은 김영란법 얘기 나오면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필자 얘기에 동의할 사람이 없으니 체면 깍이지 말고 점잖게 가만히 있으라는 충고였다.
결국 언론인에 대한 불신이 없었다면 아무리 정치인들이 그런 법을 만들겠냐? 아마 기자를 공무원으로 보는 무리한 법이 만들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언론사를 세우고 취재보도 하겠다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도의 규모에서 국회출입기자가 1400명에 달한다니 아무래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모두 무리하고 비정상적인 실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역사를 가진 대형 언론사에 대해선 기사에 대한 불만이 있으나 제대로 대응도 못하면서 작은 언론사에 대해 ‘갑질’을 해 대는 꼴 볼견이 심심치 않다는 생각은 아마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왜 사사건건 물고 뜯느냐고 언론에 항의 하면서 “너희는 뭐 잘났다고 갑질이냐”고 해대는 사람들이 많다고 본다.
“언론이 어지러운 세상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어지럽히고 있다”는 비판이 독자들로부터 많아지고 있다.
그간 우리 정치계는 “초토화”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언론들이 정치인에 대해 집중공격을 해대니 웬만한 것 그냥 넘어가던 검찰도 마음 먹고 “법대로”를 외치며 불법을 저지른 정치인들을 줄줄이 조사하기에 바쁘다. 20대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자들 역시 더 이상 권력과 결탁하며 머리를 굴릴 필요를 느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의 선택과 판단이 주가 되어야 하며 그로 인한 신문사의 영양력과 경영실적으로 말해야 한다.
이분법적으로 언론을 나누는 괴상하면서도 폭력적인 편 가르기는 없어져야 한다. 오직 기자들의 정직함이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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