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하고 있는 일은?

어쩌자고 잡초는 그리 무성하게 잘 자라는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날 고생을 하나 싶다가도 어쨌든 내가 뿌려놓은 씨앗이니 거두어야 할 몫도 내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잡초 역시 내가 심지는 않았어도 그 씨앗의 인연으로 내 앞에서 자라고 있으니 그 역시 내 밭에서 자라고 있으니 그 역시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로 싸잡아 비난하는 기사나 댓글을 볼 때마다 맥이 탁 풀린다.
나도 이렇게 부끄러운데 그 속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볼 때 오죽할까? 언론에 회자되었던 아니던 간에 우리는 사회적 범죄행위는 엄중하게 처벌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폐청산과 같은 치우친 주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또한 다툼은 다툼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할 때 적폐청산은 요원할 것이다. 미움을 미움으로, 원한을 원한으로, 다툼은 다툼으로 되갚을 것을 배운다면 이것은 또한 적폐가 아니라.
“너는 나쁜 놈이니 쫓아내야해, 너 같은 나쁜 놈을 가만두는 사람은 없어져 마땅해”라는 감정이 일어남은 세간 적 기준으로 바난 받을 일만은 아니다. 하물며 정의를 표방한 일조차 그럴 진데 상대의 허물을 들춰내어 여러 사람에게 마음의 증오를 일으키는데 머리를 써서는 더욱 아니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살다보면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성을 내며, 독한 비난을 줄기차게 해대면 아름다운 삶이 아닐 것이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일등을 바라고 성공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성공과 일등이 되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성공을 꿈꾸면서도 그 과정에 노력이 있다는 사실을 곧 잘 잊어버리는 것 같다. 우리는 조건이 있는 일은 누구나 잘하려고 한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하기보다는 지나치게 강요와 회유라는 양단의 조건에 의해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공부를 할 때나, 심부름 등의 무엇인가를 할 때 우리는 반드시 어떠한 조건이 있어야만 했다.
예컨대 “성적이 올라가면 무엇을 해주겠다.” “심부름 잘하면 얼마를 주겠다.” 는 등 매사에 채찍과 회유라는 조건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자신의 생활습관과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걸까? 눈치 봐서 하는걸까? 시켜야만 하는 걸까? 시켜서도 안되고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가. 이 모두가 교육에 문제가 있다. 진정한 평가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행해야 한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실천적 행동에서 그 가치가 빛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떠한 조건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만일 조건이 없는 데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때론 우리들은 지나친 욕망이나 욕심 때문에 잘못된 판단으로 허물이라는 발자취를 남길 때가 있다. 곧 나만의 발걸음으로 족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 사람은 많은 사람 속에서 홀로 빛나 보일 것이다.
또한 남이 보지 못할 때에 보일 것이다. 또한 사람이 생명 앞에서 그토록 아깝던 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불편한 마음을 부여잡고 있노라 드넓은 광야의 풍경과 불타는 저녁노을을 다 놓쳐버린 시간이 부질없었다.
어떤 것이 더 소중한가. 잃은 것을 취할 것인가. 현재를 취할 것인가. 가까이 당해주고 대범하게 놓아 버리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여행인 것을, 아이처럼 서툴고 낯설어 눈 앞에 두고도 길을 헤매는 것을 주머니 속 돈도 잃고 바가지도 써가면서 그래도 뭔가를 얻어오는 그것이 여행인 것을….
삶의 현장에서 터득하는 통찰을 통해 되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바람이 어쩌자고 내 마음을 간질거린다.
언젠가 떠날 수 있는 나였기에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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