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 삶과 신문지의 추억

무한한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일등을 바라고 성공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성공과 일등이 되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성공을 꿈꾸면서도 그 과정에 노력이 있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는 것 같다. 우리는 성공이 있는 일은 누구나 잘하려고 한다.
그러나 조건에 의해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공부를 할 때나 심부름 등의 무엇인가를 할 때 우리는 반드시 어떠한 조건이 자발적으로 하기보다는 지나치게 강요와 희유라는 양단의 조건에 의해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매사 채찍과 희유라는 조건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이 자신의 생활습관과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하는가? 자신을 누군가가 보면서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는 누구나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평가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행해졌던 아무런 조건이 없는 실천적 행동에서 그 가치가 빛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렇게 은연중에 자신에 몸에 익은 습관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될 것이다.
어떠한 조건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만일 조건이 없는 데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다며 바로 그 사람이 큰 사람일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많은 사람 속에 홀로 빛나보일 것이며, 그 자신도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먼저 보는 능력이 있다면 달라질 것이다. 때론 우리들은 지나친 욕망이나 욕심 때문에 잘못된 판단으로 허물이라는 발자취를 남길 때가 있을 것이다.
“배려”란 상대방 처지에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일이다.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에게 문을 잡아주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일부 사람에는 쑥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런 행위가 뒷사람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고, 교육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뒷사람에게 문을 잡아주는 일을 아이들에게 손쉽게 가르치는 방법이 있다. 바로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다닐 때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을 실제로 해보이는 것이 내가 나의 배려다.
만일 포장에 쌓인 신문이 날짜가 지난 서대문자치신문이 있다면 활자를 본 순간 얼마나 설레이겠는가. 그것도 날짜가 훨씬 지나 신문이 나의 포장지에 쌓여졌다면 활자로 접한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처음에는 우연히 신문포장을 해 보냈는데 뜻밖에도 받음이 좋아 지금은 모든 상품을 신문지로 포장한 만큼 나의 포장은 실감난다. 주고받는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그것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남은 신문을 포장지로 싸서 보인다는 것은 기분 좋게 느껴진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들의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 그 문자를 공유하는 것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공동체의 신문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좋아진다. 누구도 공감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을 같은 문자라는 매개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 천 년 역사도 문자로 기록되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인터넷이란 사이버 세상에서 과거, 현재의 모든 소식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향에서 늘 곁에 두고 보던 신문을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만나 읽게 된 것은 단순한 신문 그 이상일 것이다.
아마 그것이 날짜가 지난 헌신을 알지라도 쉽게 버리지 못할 만틈 나무그늘에서 돗자리 대신 신문지를 펴 도시락을 먹으며 자의 하나하나가 살아서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밥이 되는 이유를 만끽하녀 이번 여름무더위를 질 지났다면 그것으로 일등삶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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