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과 혐오의 차이

겉보기에 아무리 안정되고 단단하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아도 세상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흐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화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위로 아무런 질서 없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원인없는 변화는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현실의 본성이다.
삶은 비참함이나 고통이 아니라 줄거움, 괴로움 그 중간이 섞여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네 가지의 기본을 말하고 싶다. 즉 사념치(the four foundatlons ofmidtniness) 四念處이다. 첫째는 몸에 대한 알아차림 (身念處)으로 호흡과 감각의 수많은 느낌을 관조하는 것이요. 둘째는 느낌 즉 감각에 대한 반응, 생각인 수념처(受念處)로서 사건에 연결되어 일어나는 느낌의 어떠한 정조(teeling tone)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셋째는 마음 그 자체에 대한 알아차림인 신념처(心念處로서 마음속 집착과 탐욕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넷째는 정신적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인 법념처(法念處)로서 생각과 지각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면 무아(無我, no selt)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면에서 무아보다는 비아(非我)라고도 한다. 오늘도 나라는 존재의 나락에서 헤매이지 말고 모든 존재의 고통을 비아(非我)로 극복하기 위한 통찰과 관조가 필요한데 세족의 불구덩이는 그를 쉽게 하지 아니한다.
자기 협오는 자기과잉보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SNS에는자기 과잉이 넘친다. 먹는 음식, 입는 옷, 좋아하는 연예인, 영화, 음악 뿐만 아니라 친구, 부모와 같은 나 이외의 것들을 수시로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한다. 나 아닌 것을 자기로 삼는 건 그만큼 속이 허전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어른이 돈과 권력을 자기로 삼는 오랜 습관에 길들여져 있으면 젊은 사람들은 SNS로 만든 자기에 갇혀 산다. 애나 어른이나 자기 자신 때문에 괴롭기도 마찬가지다.
자기과잉이 지나친 이들의 속에는 깊은 자기혐오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피곤해, 나는 왜 이런 일상을 살아야하지.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나는 이런 상황을 버틸수가 없어 언제 폭팔할지 모르는 내가 두려워 나는 도무지 쓸모가 없어 이렇게 못났으니까 미움 받아 마땅해. 스스로도 불신하고 구려움 미움이 도사린 그 마음이 자기를 지키려는 쪽으로 작동하며 자기 과잉이며 남을 향하면 타인 혐오가 된다. 그러니 남을 혐오하는 것이 사실은 자기혐오이며 자기과잉의 다른 표현이다.
잘못한 만큼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받아야 마땅한 만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삶 전체를 낙인찍고 혐오라는 것은 모두를 해롭게 만든다. 타인에 대한 광기에 찬 혐오는 아무리 정의로 포장한들 사실은 자기혐오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움과 고움을 번갈아 지니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내가 나 아닌 사람을 따뜻이 대해주고 보듬어 주고 감싸 안아주고 그가 잘되기를 기원해주고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면 그 또한 더할 수 없이 좋은 일이 아닌가.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두사람과 떨어짐이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는 어른의 말씀도 그래서 깊이 새기게 된다.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은 둘 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어느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사랑이 나오고 미음이 나오지 않을까. 이를 알면 시비도 없게 되고 밉고 고움도 없을 것이다. 미움과 사랑이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밉고 고움을 따지기 전에 그 뿌리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소통되는 생명들이다. 오늘 또 한 번 생명에 감탄하며 이 정체 없는 뱃속이 든든함을 향유하면서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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