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자기 과잉의 가치

혐오가 넘쳐나는 시대다. 어떤 이는 자기를 향한 혐오로, 어떤 이는 타인을 향한 혐오로 불탄다. 언뜻 들으면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다.
누군가를 지나칠 정도로 혐오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안의 상처와 분노에 깊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자기혐오는 자기과잉과 동전의 양면이다. 먹는 음식, 입는 옷, 좋아하는 연예인, 영화, 음악뿐만 아니라 친구, 부모와 같은 나 이외의 것들을 수시로 드러내고 인정받으려한다.
나 아닌 것을 자기로 삼는 건 그만큼 속이 허전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어른이 돈과 권력을 자기로 삼는 오랜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면 젊은 사람들은 SNS로 만든 자기에 갇혀 산다. 애니 어른이나 자기 자신 때문에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산골에서 청년들과 2년 동안 어울려 살면서 또 다른 “자기과잉”을 접한다. 대안적 삶을 찾아 온 청년들이지만, 그들만의 또다른 자기타입이 있다.
농담 삼아 불편하다는 말이 제일 불편하다고 말 참 많이 들었다. 참 행복하고 여유로워 한다. 이 땅에서 넘어진 자 이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옛말처럼 변화무쌍한 일상에서 사로 잡혀 아무런 밖을 향한 문을 잠근들 참된 진리는 찾기 힘들다.
자기과잉과 지나친 이들의 속에는 깊은 자기혐오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피곤해 왜 이런 일상을 살아야하지,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야. 이런 상황을 버릴 수가 없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자신이 두렵다. 이렇게 못낫으니 미움 받아 마땅해. 스스로를 불신하고 두려운 마음이 도사린 그마음이 자기를 지키려는 쪽으로 작동하면 자기과잉이며 남을 향하면 타인 혐오가 된다. 그러니 남을 혐오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혐오이며, 자기과잉의 다른 표현이다.
사실 근자에 지독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악마화 된 몇몇 사람들도 삶을 보면 그렇게 혐오의 대상이 될 사람이 아니다. 8활은 공(功)이고, 2활이 과(過)인데, 부분적인 과로 삶의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잘못한 만큼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받아야 마땅한 만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삶 전체를 낙인찍고 혐오하는 것은 모두를 해롭게 만든다.
타인에 대한 광기에 찬 혐오는 아무리 정의로 포장한 들 사실은 자기과잉, 자기혐오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이 두 극간을 넘어 중도의 눈으로 실상을 관찰한 뒤 우주만큼 혼제한 세상에 하나의 힘이 될 수 있다.
잘못한 만큼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받아 마땅한 만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삶 전체를 낙인찍고 혐오하는 것은 모두를 해롭게 만든다.
타인에 대한 광기에 찬 혐오는 아무리 정의로 포장한들 사실은 자기혐오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사람의 몸이 가지 못하는 곳은 거의 없는 세상이 됐다.
한국에 없는 물건도 온라인 통하면 곧바로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다. 맛집으로 소문나면 아무리 멀어도 찬아간다. 이제 이동(移動)도 수단이 아니라 온전히 마음의 문제가 되었다. 마음이 없다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 필요도 없지만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험해도 시간을 내어 찾아간다. 사회적 소통도 마찬가지다.
SNS를 통해서 사람을 모아낼 수 있다면 아무리 큰일도 이루어지는 것이 요즘이다. 세상을 바꾼 광화문 광장의 촛불도 SNS에서 몇 명의 제안으로 이루어졌으며 프랑스의 “노란조끼” 시위도 유트브에 올린 한 평범한 주부의 연설이 촉발했다. 이 같은 사례는 마음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버여준다.
사람이 없는 것은 거리가 멀거나 누가 말려서가 아니라 마음이 끌리지 않기 때문이다. 감동의 마음 교류, 감정을 누군가 알아주고 함께 한다고 느낄때 상대방은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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