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을 보시하라

사람이 오복을 모두 갖춰 태어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특별한 재운(財運)을 갖고 태어나 갑부가 되고 어떤 이는 빼어난 학운(學運)을 받고 태어나 건출한 학자가 되고, 또 어떤 이는 수명 장수할 목을 지니고 태어나 오래오래 살았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속된 중생심으로 혜탕해서 하는 말이지만 불상(佛像)의 조연, 인연도 가끔 인간사의 범례에 들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어서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은 어떠한 마음을 내라는 것일까? 머무르지 않고 베푸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온 일곱가지 보배로 가득 채워 베푸는 공덕보다 경전 가운데 네 구절로 된 게송 하나라도 남들에게 가르쳐주고 설명해 주는 공덕이 훨씬 크다. 또한 게송을 전해 주는 것이 갠지스간의 모래알처럼 많은 몸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공덕이 뛰어나다. 왜 그런가? 현상(現想)에서 벗어나 본성(本城)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 몸은 생·노·병·사하고 마음은 상·주·이·멸하지만 본성인 관찰자는 상·락·아·정이다. 항상하고, 행목하고, 본성인 내가 있고, 청정하다. 재보시나 몸 보시는 형상을 충실히 하는 결과를 낳고, 법보시는 본성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는다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렇게 머무는 바 없음을 연습하는 것이 대면(對面) 관찰(觀察)이다. 몸에 대해 몸을 보고, 느낌 대해 느낌 보고, 마음 대해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내임을 붙여야 한다 이것이 생사해탈이자, 중생제도다. 이어서 관찰로 대면하면 보시가 이루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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