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테르 눈물, 누구 책임인가

한 상 림 작가

한국예총 예술시대작가회장 역임.
한국예총 예술세계 전문위원

최근 연이어 터지는 연예인들의 극단적인 선택 소식이 참으로 안타깝다. 유명 연예인이 되기까지 수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으면서 악플을 견디지 못해 하나뿐인 귀한 생명을 스스로 던지게 되는 것이다.
살인마는 남의 목숨을 잔인하게 끊어놓고도 뻔뻔하게 고개 들고 큰소리치는 반면에 남의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죽음을 택하기까지 얼마나 괴롭고 답답했을까. 그러나 막상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최후의 순간에는 살려달라고 몸부림쳐보지만 때는 이미 늦는다고 한다.
가수 ‘설리’에 이어서 ‘구하라’가 이십 대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왜 이렇게 가슴이 멍해지고 사진 속 젊은 눈빛이 애처로운지. 그들의 원성을 대신하여 이 사회에 묻고 싶다. 오죽했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냐고, 고인에게도 되묻고도 싶다. 얼마나 기댈 곳이 없었으면, 어디에도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곳이 없었으면, 죽음을 택했냐고?
죽음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죽음이 끝은 아니다. 어차피 누구나 다 죽음을 맞게 되는데, 지혜롭게 헤쳐나가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도 병상에서 누워서 실오라기 같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라. 죽을 용기로 무엇인들 못 할 게 없지 않은가?
베르테르 증후군은 연인 로테에게 실연당한 뒤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내용을 모방한 자살이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것에 비유해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고 하였다. 자살의 이유야 제각기 다르겠지만 특히 연예인의 경우에는 악플에 시달리다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왜 남의 사생활에 흥미로운 관심을 갖고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며 악플까지 달아서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내 사생활이 중요하면 남의 사생활도 중요한 만큼 굳이 덮어주지는 못할망정 파헤치고 확산시킬 거까지 없지 않은가?
얼마 전 검찰 조사를 앞둔 檢수사관이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연예인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충격을 주고 이를 모방이라도 하듯 연달아 터지는 비보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더군다나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이 자살률 1위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사회적인 구조에 문제가 더 많다.
SNS에 떠도는 악플로 걷잡을 수 없는 들불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가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현상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속수무책으로 방치한 구조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그 정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악플을 다는 사람은 재미로 혹은 복수심으로 다는지는 몰라도 그 당사자에겐 치명적인 독소로 죽을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자살은 본인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와 아픔을 남긴다. 어떤 상황에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지혜롭게 헤쳐나갔으면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아무리 힘들고 지치고 고통스러워도 그 순간은 곧 지나가게 된다. 조금만 더 참고 길을 찾아가면 또 다른 희망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 시대의 베르테르들이여, 잠시 혼란스럽고 견디기 힘들더라도 꿋꿋이 이겨내길 바란다. 죽음보다 더 힘겨운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할 남은 가족을 생각해서 절대로 극단적인 선택만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필자 역시 그런 아픔을 갖고 단 하루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적 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은 사람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대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밝은 희망의 사회를 꿈꿔 보면서 절대로, 절대로, 이 사회에는 아니, 그대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하면서 삶의 희망을 제발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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