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
황 일 용 발행인
벌써 10년이 되었다. 2005년 봄 강원도 양양 일대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낙산사가 전소되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시대 예종의 아버지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했던 낙산사 동종은 녹아내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보물 499호 낙산사 칠층석탑도 일부 떨어져 나가거나 균열이 생기는 등 화마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발화 지점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던 낙산사까지 피해가 미친 것은 나무가 바람 때문이었다. 의상스님의 관음도량이라는 유명세 못지않게 화재전의 낙산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동해 바다의 우거진 소나무들이다.
소설 낙산사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됐던 김홍도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778년 낙산사(落山寺)에도 온통 소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의 절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소나무가 바람을 타고 왔던 화마의 불쏘시게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사실 나무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 세상에 잠시 머물 때 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항상 함께 해 왔다. 룸비니 동산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이 오른손으로 잡았던 것이 무수(無憂樹)였다.
고랭과 선정(禪定)의 과정을 거친 후 보드가야에서 마귀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될 때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튀쉬나가라에서 열반에 들어갈 때에는 사라수(斯羅樹)아래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런데 간혹 한 두 곳에서 보리수를 귀하게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절에서는 보리수나 무수 사라수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 나무가 우리나라 습생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통 사찰치고 소나무가 즐비하지 않는 곳이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지가 있는 인도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나무다. 우리나라 절에서 소나무를 심기 시작하는 것은 신라시대 말로 추정된다.
도선비기(道詵飛記)의 저자로 알려진 승녀이자 풍수가도선(827~898년)과 관련될지 모른다.
그는 땅의 지세를 누루거나 살리기 위하여 절에 천불을 봉안하고 산천 곳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절의 기맥을 보완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소나무를 심어서 살리는 것은 조선시대 왕릉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능원(陵園)의 용맥(龍脈)을 따라서 혈처(穴處) 좌우 능선인 내청룡맥(內靑龍脈)과 내백호맥(內白虎脈)에 적송(赤松)을 뺘곡하게 심은 것이다.
이는 대규모로 황제릉을 만들면서 유송(油松)이나 석회암 토양에 잘 자라는 측백나무를 심어서 기맥을 보완했던 중국 명나라 풍수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베트남의 왕릉에서 그 영향을 받아 남송(湳松)을 심어 기맥을 보완했다.
이식하기 쉽지 않은 소나무를 절에서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풍수학과 관련될지 모른다.
이제 소나무는 사람들이 전통사찰을 인식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절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나무가 되었다.
법당과 석탑 등 어느 하나 소나무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10년 전 낙산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법당과 너무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들을 어느 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소나무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우리나라 절에서 소나무를 심은 것은 신라시대 말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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