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부패와 국가의 흥망, 그리고 청렴

서울지방보훈청
홍보담당  오 제 호
유사 이래 수없이 반복되었던 국가들의 영고성쇠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국가 멸망의 내적 요인으로는 부정부패가 가장 대표적으로 지목된다. 한 나라의 발흥기에 확립된 국가의 기강은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느슨해지다가 쇠퇴기에 이르러서는 문란해지며 국가를 흔드는 가장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이 위기를 극복하면 국가는 중흥기를 맞이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국가는 존망의 기로에 놓인다. 이에 아래에서는 명나라의 사례를 통해서 부정부패가 국가의 운명에 미치는 극적인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명나라의 건국자 주원장은 가난한 농부 출신으로 탐관오리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몸소 경험했다. 따라서 관료들에게 청렴결백할 것을 강조했으며 부패한 자는 엄격하게 처벌하였고, 스스로도 주야로 정무를 보며 청렴과 검소, 부지런함을 두루 갖춰 모범을 보였다. 이러한 주원장의 철학에 따라 명대의 관료들의 녹봉은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적었다. 주원장이 살아있을 때에는 개국 황제의 강력한 권위로 관료들의 불만과 일탈을 제어했지만, 문제는 주원장의 사후였다.
그간 주원장의 방침에 따라 겉으로는 청렴하게 생활하는 듯 했던 관료들은 실제로 뇌물과 횡령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며 부패가 싹트게 되었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장거정이다. 장거정은 명나라 13대 황제인 만력제의 스승이자 명신으로 각종 개혁을 이끌던 유능한 인재였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밝혀진 황제를 능가하는 재산들은 결코 녹봉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거정의 사후 스캔들은 당시 사회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만력제는 장거정의 사후 모든 정사를 폐하고 장장 30년에 걸친 칩거에 들어간다. 명나라와 같이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국가에서 황제의 파업은 국정운영이 완전히 중단된다는 것 외에도 또 다른 거대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부패를 제어했던 강력한 황제권의 행사가 중단되자 자연스럽게 관료들은 횡령과 착복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만력제 사후 8년 뒤인 1628년,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물려받은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 만리장성 재건 등으로 바닥난 국고, 기아, 도적과 농민반란이 창궐한 멸망 16년 전의 명나라였다.
명사(明史)의 기록은 이렇다. ‘기강이 해이해지고, 군신이 통하지 않으며, 이익을 쫓는 소인배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서로 다퉜다. 명나라는 실로 만력제 때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강희제 또한 이렇게 평했다. “숭정제를 망국의 군주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만력 등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 만력제에 대한 혹평과 아울러 부정부패에 의해서 멸망을 길을 걸은 명나라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종합하자면 청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렴을 강조했던 주원장의 노력은 그의 사후 무위로 돌아갔고, 만력제의 칩거 30년을 거치며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 부정부패는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중국의 사례이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삼정의 문란을 겪었던 조선을 비롯하여 고려와 신라 또한 부정부패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멸망했음을 떠올리면 위의 사례가 결코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국가 차원의 반부패 정책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따라 청렴 부분에서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는 우리나라에 위의 사례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다만 부정부패가 국가에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을 명나라의 멸망을 통해 거울삼아 부정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있겠다. 12월 5일부터 11일까지 실시된 반부패 주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주원장과 같은 황제 1인의 청렴이 아닌, 국민 모두의 동참 하에 청렴을 하나의 문화로 만들어 가는 일, 바로 이것이 ‘청렴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서대문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