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한번 째 삼일절을 맞으며

박상희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거족적 항일운동의 대표 격인 3·1운동의 물결이 우리나라를 뒤덮었다. 그 시작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자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1919년 3월 1일이었다.
당시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일반 민중들과 만세운동에 동참하려는 인파가 서울에 운집했다.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기미독립선언서를 공표함으로써 마침내 3·1운동의 막이 올랐다.
물론 일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그냥 두고만 보지 않았다. 초기에는 비폭력 평화 시위였던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국민들을 서대문형무소 등에 투옥하고 고문을 가했다.
그럼에도 3·1운동의 열기는 수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민중과 지식인의 반향을 일으키며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는 물론 만주와 미주 등 국외에서도 만세운동이 펼쳐지며 5월까지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이어졌다.
이러한 3·1운동이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문화&학술단체, 민족교육기관, 여성단체, 무장 비밀결사 등 각종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 특히 항일무장투쟁의 근간이 된 독립군의 결성과,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3·1운동은 독립운동사를 넘어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3·1운동을 기억하고 그 가치를 계승하고자 대한민국은 3월 1일을 국경일로 제정하여 국가 차원의 축전을 거행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매년 3월 1일에는 정부 기념식을 개최하여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전국 각지에서 진행한다.
독립운동을 위해 일신을 바치고, 일가권속을 희생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경술년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6·25전쟁을 비롯한 일련의 시련들이 있었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아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지금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거울삼는 한편 그 속에서 발현된 애국자들의 숭고한 정신적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더 공고하고 영원하게 만드는 첩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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