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 순수함으로 돌아가라

에세이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지”하는 생각으로 살다보면, 그 어느 쪽이든 행복이나 성공에서 먼 거리에 놓여 지게 된다.
남과 자기가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줄로 매여 있어서 똑같은 운명의 나룻배를 타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소문을 좋아한다. 좋든 나쁘든 간에 말하기 좋아하고 상대를 중상모략하기도 하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
어떻게 잘못 말하면 꼬투리가 잡혀 도리어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 해가 오기도 한다.
어느 줄에 설까. 어디에 붙을까만 생각하며 살아온 인물은 끝까지 주접을 떨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구제불능인 속물적 인간의 전형이다.
정치권에는 이와 같은 인물들이 무수히 많다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그런 인물일수록 때론 잘 나가기도 한다.
윗사람의 마음을 끌기 위해 알랑거리는 것은 윗 사람을 속여서라도 자신의 믿음을 얻겠다는 욕심뿐이다.
그런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남과 사이를 이간시켜 놓으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이 미움이나 원한을 품은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혼자 생각으로 남을 증오하고 있더라도 미워하는 자신도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거짓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 자기가 생각하는 전부를 언어로 전할 수 없을 것이요. 어떤 때는 반대의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생각지 않는 말이 불쑥튀어 나와 덜미가 잡힐 수도 있다.
친절한 말, 은근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유사시 폭언을 하고 손을 들어 때리지는 않더라도 위협하는 행위, 또한 어떤 묘책을 꾸며 남을 눌러서 못쓰게 만들어 놓는 심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서도 정당함이 모함으로 부당함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또한 조그만 부당함이 말의 위력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상종 못할 사람”으로 낙인찍힌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말이란 자신의 주관적 개념이 넘쳐흐르긴 하나, 한편으로 그 대상의 값어치까지 결정된다.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남을 헐뜯는 일은 그 당시에는 실랄하나 거짓말을 하고 편안해 질 이유는 없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말, 자신의 잘못을 먼저 시인하고 타인의 고칠점을 기분 상하지 않게 표현하는 기술은 그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책과의 만남, 인격배양, 질서 속의 생활 등이 꾸준해질 때 얻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몸과 입과 뜻의 삼업(三業) 중 다른 업은 세가지씩 있으나 구업(입)에는 거짓말(망어:妄語), 한 입으로 두 가지로 하는 말(양설: 兩舌), 욕하는 말(악구:惡口), 비단같이 꾸미는 말(기어:綺語) 등 네가지를 나쁜 말로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말에 소통시키는 말을 잘 사용하면 행복한 것이지만 잘못하면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이 모두를 누구보다 잘 알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말로 남을 헐뜯는 말이 나온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말로 당한 사람은 그 상처가 오래간다. 말한 사람은 금방 잊어버리고 뒤끝이 없다지만 듣는 사람은 그 말 한마디가 평생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더 이상 “광견(狂犬)이나 도둑고양이” 되기전에 집착과 욕망을 버리고 이제까지 쌓은 명성과 명예를 위해 존경받을 수 있는 언어(말)와 행동으로 처신하길 바란다.
“호미”로 막을 말을 “가래”로 막을 말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지 마라.
그리고 이제부터 태어날 때의 순수함으로 돌아가 부처님, 예수님, 신령님께 진심으로 빌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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