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과 세간법

 

세간법이라 함은 세속생활을 가르치는 것이고, 출세간법 즉 불법은 신앙생활을 가르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입신양명하고 경제 절검하여 상봉하솔을 잘 하는 것은 가정과 육신을 행복하게 안정시키는 도이다. 반면에 불교 즉 출세간법은 불타를 신앙하고 법을 듣고 도를 닦아서 정신적으로 심령을 안정시키는 도이다. 그러므로 불자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하여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환경이 정돈되지 못하면 정신 안정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이것과 반대로 신앙생활의 정신안정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가정과 육신 안정을 바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생활에 관심이 없어서 가족이 빈궁에 빠지면 결국 가족도 흩어져서 가정생활을 이룰 수가 없으니 어찌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살수가 있겠는가? 그런즉 행복을 바랄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생활에 급급하여 재산만 모으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리에 몰두하여, 신앙심이 없고 도의 정신이 박약하면 억만장자로서 아무리 재물이 많다 하여도 그 돈은 필히 공금횡령, 세금포탈, 밀수입, 밀수출 등의 부정한 수단으로 모은 재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돈은 돈대로 몰수당할 뿐 아니라 벌금까지 겹치고 형사문제로까지 번져서 사회에서 매장을 당하며, 가족은 날벼락을 맞고 가슴에 상처를 입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니, 그런즉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정신안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제를 너무 무시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육조단경에 “불법이 세간에 있어서 세간을 떠나서 깨달을 수가 없나니.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려 한다면 마치 토끼의 뿔을 구하려는 것과 같으리(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離世覓菩提 怡如求兎角)”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실례를 들어보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지 4년째 되는 해에 폐사리 성외의 큰 수풀나무 밑에서 잠깐 수도하고 계시다가 사위성을 찾아가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시었다. 그런데 그해 7월 가뭄이 극심하여 하수의 물이 마르고, 전답이 타게 되어서 전답에 물을 끌어대기에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필경에는 집단적으로 싸움이 일어났다. 가피라 성과 구리성의 국경사이에 흐르는 로오히니강 물을 둘러싸고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곡식 이삭이 피어 익을 무렵에 물이 귀해서 서로 강물을 인수하려고 하기 때문에 두 나라 백성이 대치하여 서로 욕설을 퍼붓고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시비가 여러날 계속하다가 결국은 활을 쏘고 창으로 찌르는 무력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에서 이러한 상황을 듣고 제자들이 말리고 잡는 것도 뿌리치고 법복으로 의를 갖추시고, 양국이 대치하여 싸우는 전쟁터에 갔다. 화살이 빗발치는 이 전쟁터 한 가운데 꿋꿋이 서서 염불과 주문 그리고 경문을 외우시며 계시었다. 양군은 서로 부천님이 나와 계신 것을 확인하고서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하고 부르며 잠깐만 몸을 비켜주소서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꿈적도 아니하고 서 계시었다. 두 나라의 왕은 승봉하는 부처님이 친히 나와 계시므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멈추고 말았다. 부처님께서는 양군의 대표인 수령을 이곳에 불러오라고 하시었다. 그리고는 양쪽 군대의 책임자들에게 묻기를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여기 모여 있는가?”하자 “서로 전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시자 대답하기를 “날이 가물어 전답에 댈 물이 모자라서 강물을 서로 끌어가려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관개수의 가치가 더 중요한가?”하고 묻자 “그거야 말씀드릴 것도 없이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관개수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가? 전쟁을 한다고 비가 올 것 같은가? “비야 오거나 말거나 서로 욕설들을 하다가 서로 화가 치밀어 욕설만으로 분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직접 행동으로 나온 겁니다.” 이를 듣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욕심을 가라앉히고 분심을 가라앉혀라. 이것이 모두 곡식 때문이니 곡심만을 생각하면 도심이 없나니. 도심을 일으켜서 여러 마음이 화합하여 마음 부처에게 빌면 인심이 곧 불심이요, 천심이기 때문에 비가 내리리라”하고 부처님께서 그들 앞에 신축을 하시었더니 사방에서 검은 구름이 모여들어 소낙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 어떤 나라 정사에 계실 때 바라문교를 숭배하는 화점왕이 있었는데 부모에게 효행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그의 모친이 고령으로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바라문에게 치유의 방법을 물었더니 대답하되 이 병을 낫게 하자면 백 마리의 축생을 모아 도살하고 또한 소년 아이를 죽여서 그 피로서 천신에게 제사를 모셔야 그 공덕으로 모후의 병환이 쾌차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들의 말을 곧이듣고 신하를 불러서 백  리의 짐승을 잡고 소년아이를 물색하여 값을 주고 죽이라고 하였다. 신하는 유유복종하고 살생을 감행하려고 하였다. 걸식을 하려고 나왔던 비구가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부처님 계신 곳으로 달려가서 직고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 길로 달려  오시어 동문 밖에서 화점왕을 만나 바라문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참혹한 살생을 금지하고 소년을 살해하는 일도 금지케 하시었다.

의식을 얻으려면 농사를 짓고
부자가 되려거든 보시를 행하라.
장수를 하려거든 자비를 베풀고
지혜를 얻으려거든 학문을 배우고
병을 고치려면 안심을 가져라.
(欲得衣食將行耕
欲得大富將行布施
欲得長命將行大悲
慾得智慧將行學門
欲得治病將行安心)

왕이 이 법문을 듣고 모후에게 알려드리고 약을 써드렸더니 모후의 병이 씻은 듯 나아버렸다. 그래서 그 뒤부터 모자가 극진하게 불교신자가 되었다. 부처님의 이 법문을 보면 합법적이요. 도덕적이요. 과학적임을 알 수가 있다. 과연 불법이 곧 세간법이라고 하였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생명이 있으니 육체적 생명, 도덕적 생명, 종교적 생명이 그것이다. 그런데 육체적 생명은 50년에 불과하고, 도덕적 생명은 천년을 전하고, 종교적 생명은 영겁에 불멸하여 세간의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다. 위에서 설하신 부처님의 10구 법문은 과연 영겁의 진리라고 하겠다. 가정은 인간의 나체(裸體)니 군인, 상인, 교육가, 정치가, 실업가 할 것없이 종일토록 가정밖에 나아가서 시달리다가 저녁때 가정에 돌아오면 옷을 벗고 안식하며, 부모에게 위안을 받고 아름다운 부인과 천진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끼나니 가정이야말로 얼마나 다행한 인간의 안식처인가. 그러므로 가정은 거리낌 없는 인간의 나체라고 하는 것이다.
종교는 정신의 나체이니 불전에 꿇어앉아 감사하고, 삼업을 참회하고, 안심하며, 고요히 기도를 드리고, 애환의 고락사를 놓아버리고, 선정에 잠겨서 정려(靜慮)와 안심을 얻게 되나니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하고 거룩한 생활인가?
장수의 비결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노할 일이 있더라도 노하지 말 것이요. 둘째는 불편을 말하지 말고 행복감을 가질 것이요. 셋째는 지나간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되새기지 말 것이요. 넷째는 현재에 만족하고 미래를 근심하지 말 것이요. 다섯째는 남에게 대하여 신심을 베풀 것이다. 이것은 불교 신심이 아니고서는 찾아 볼 수 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불교는 장수의 비결도 되는 것이다.
옛날에 양관 화상이란 스님은 언제든지 양식인 식량을 5홉 밖에 준비를 하여 두지 아니한다고 하여 스님이 게시는 암자의 이름을 5홉암이라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스님이 방에 앉아서 염불을 하고 있자니까 도둑이 들어와서 5홉의 쌀 밖에 남지 아니한 것을 빡빡 긁어 갔다. 스님은 이때에 창밖으로 비취는 명월을 바라다보고 허허 웃으며  “그 사람이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쌀은 훔쳐가면서 어찌하여 저 명랑하고 밝은 명월은 손도 대지 못하고 가버렸는고”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얼마나 욕심이 없고, 만족하며 청정한 생활인가.
떠 옛날 종기 화상이란 스님은 제자인 상좌와 같이 운수 행각을 하다가 어떤 여관 주막에 들었는데, 그날 밤에 주부가 난산 진통을 겪으면서 산파노인과 같이 산실로 두 스님을 청하더니 “스님 제가 해산중인데 배가 몹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으니 속히 순산 기도를 해달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산파도 거들면서 자기 재주론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 두 스님께서 그리하여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이리하여 두 스님은 이미 산실까지 들어가서 회피할 수도 없고 하여 다시 생각하되 대자비를 표방하는 승려로서 어찌 그의 소망을 저버리겠는가 하고 생각을 정했다. 그러나 염불을 하더라도 산모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진언만 외워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두 스님은 귓속말로 약속을 하고 소리를 높여서 염불을 시작했다. 스승이 먼저 “마하반야밀 나올 것이 안 나오랴”하면 상좌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하반야밀 힘을 써 하나 둘 셋” 이와 같이 스승 상좌가 번갈아 가며 외우는 소리가 꼭 맹꽁이가 우는 것 같았다고 한다. 산모는 전통을 겪는 중에는 그 스님들의 염불소리를 듣고 웃음보가 터져서 아픈 줄도 모르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분만을 하였다. 염불 힘이 빠르기도 하다고 산파가 감탄을 하였더니, 산모가 “참으로 그래요 오늘 밤에 저 두 스님이 아니 오셨으면 나는 꼭 죽었을는지도 몰라요.”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다 사심이 없는 행위라고 하겠다. 이때에 두 스님이 그 청을 거부하였거나 하면 산부에게 많은 실망을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승속 간에 사찰 생활을 하든지 가정생활을 하든지 언제든지 쾌락, 명랑, 쾌락하게 성격을 가져야 불교를 믿는 보람이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생활상에 어두운 그늘이 지는 것은 음성적이며 내성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부처님의 가피를 빌어 명랑, 쾌락하게 성격을 고치고 아무 잡념이 없이 생활하면 그대로 도인의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둘이 아니라고 하겠다.
대한불교 무량종 지리산 칠보정사
효종 혜안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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