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佛敎)의 중도사상(中道思想)

 

불교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해탈의 중도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번뇌의 불꽃을 타오르지 못하게 끄고 애욕의 그물을 끊어 해탈의 중도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다 마치 넝쿨을 뻗으며 무성하게 자라나는 잡초를 잘라버려도 곧 새싹이 돋아 나오듯이 번뇌의 불꽃도 어떤 공부로 억지로 꺼버렸는가 싶으면 어느새 다시 타오르고 만다. 그러므로 이 번뇌의 불꽃을 꺼버리고 애욕의 그물을 끊어버리기 위한 공부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원시불교의 사념처관과 오정심관동이 그것이다.
사념처관이란 첫째는 관신부정(觀身不淨)이요, 둘째는 관수시고(觀受是苦)요, 셋째는 관심무상(觀心無常)이요, 넷째는 관법무아(灌法無我)이다. 관심부정이란 것은 몸이 청결치 못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우리의 색신이 다섯 가지 부정이 있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종료(種了)가 부정 한 것이다. 과거 번뇌업식(煩惱業識)의 부정한 종자가 현재 부모의 부정모혈 종자와 합해서 이 색신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둘째는 주처(住處)가 부정한 것이니 이 몸이 어머니 태중에서 생겨 처할 때에 생장(生臟)의 아래와 숙장(熟臟)의 위에 처하여 항상 더러운 훈습을 받는 것이다. 셋째는 자체가 부정한 것이니 이 색신은 36종의 부정물이 합해서 된 것이다. 넷째는 자상(自相)이 부정한 것이니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과 입과 소변과 대변을 보는 두 구멍을 합하여 아홉구멍에서 항상 부정한 물건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다섯째는 구경부정(究竟不淨)이니 이것은 이 몸이 죽은 뒤에 더러운 물이 흐르고 퉁퉁 붓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다. 사람의 번뇌가운데 제일 큰 번뇌가 남녀가 색정관계가 제일 큰 번뇌라 치정관계로 패가망신도 하고 애증의 갈등으로 서로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번뇌를 끊기 위하여 남녀가 서로 색신에 대하여 아름답게 보지 말고 더럽고 추한 물건으로 관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이 부정관으로부터 백골관(白骨觀)이 있고, 촉루관이 있으니 남녀 간에 살빛이 좋아 보이는 것도 부정한 것으로 관찰하고 또 죽어지면 백골이나 촉루같은 뼈다귀 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관찰하라는 것이다.
관신부정관 다음에는 관수시고니 수란 것은 우리가 좋다 나쁘다하고 받아들이는 감관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 감수성에 대하여서는 고수(苦受), 락수(樂受), 사수(捨受)가 있으니 고수란 것른 괴롭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요. 낙수란 마음과 몸으로 받는 즐거운 감각이요. 시수는 고통도 즐거움도 느끼지 않는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데, 어떤 수를 막론하고 다 괴로운 것으로 관찰하여 감관향락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관심무상이나 사람의 마음이 무상한 것으로 관하라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은 허공 같아서 생(生), 주(主), 멸(滅)이 없지만 우리 범부의 마음은 그러한 변사가 없는 진심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하여 가는 마음이다. 남의 마음도 믿을 수가 없지만 자기 마음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마상천변하는 것으로 관찰하고 마음을 무상한 것으로 관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관법무아이니 이것은 세상의 물체가 주인이 없는 것으로 관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각각 물건을 소유하고 네 것, 내 것하며 싸우지만 절대로 내 것이 없고, 남의 것이 없는 허망체로 인식하라는 말이다.
이상에 든 것이 우리 인간의 번뇌의 불꽃을 끄게 하는 방법이다.
다음에 오정심과(五停心觀 )이란 것은 첫째는 다탐중생부정관(多?衆生不淨觀)이요, 둘째는 다진중생자비관(多瞋衆生慈悲觀)이요, 셋째는 다치중생인연관(多癡衆生因緣觀)이요, 넷째는 착아중생분별관(着我衆生分別觀)이요, 다섯째는 산란중생수식관(散亂衆生數息觀)이다 다탐중생부정관이란 것은 즉 생욕이 많은 사람은 남녀의 신체를 부정한 것으로 관한다는 것이다.
다진중생자비관이란 것은 신경질이 많아서 사사건건 성을 잘내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자비심을 일으켜서 부드러운 성질을 가지란 것이다. 다치중생인연관이란 것은 우치한 사람은 모든 인과의 관계를 몰라서 사물을 잘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니 인연과의 의리를 관하라는 것이다. 착아중생분별관은 이 몸과 우주만유의 구성이 5온인 것이라고 분석하고 무명심을 여의라는 것이다. 산란중생수식관이란 것은 마음이 공연히 들떠서 가라앉지 않는 중생은 수식관을 하게 하라는 것이니 수식관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서 숨 쉬는 것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까지 헤아리고 또 하나 둘로부터 열까지 세기를 수천 만 번 계속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들 뜬 마음이 가라앉고 번뇌의 불꽃이 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이론은 그럴듯하나 실행에 옮기기는 모두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 당시 첨파성의 한 장자의 아들이 수롱나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다. 부모가 그를 어떻게나 사랑하여 길렀는지 그로 하여금 발을 벗고 걷지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는 발바닥에 털이 났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빔바사리왕이 수릉나의 발바닥 털을 보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어 왕사성으로 데려왔다. 왕은 수롱나의 발바닥의 털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과거에 복을 많이 지어서 금생에 이와 같이 발바닥에 털이 날만큼 귀중한 보를 받지만 이것은 유루복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내생에는 이보다 더 좋은 무루과보를 얻기 위하여 기사굴산에 계신 석가여래 부처님께 가서 가르침을 받고 수도를 하여라.”하고 권하였다.
이에 수롱나는 왕의 말을 듣고 기사굴산을 찾아가 당시 부처님의 시자로 있던 사갈타  비구가 신통변화를 보여주자 마음속에 깊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또한 부처님께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과 사제법문을 듣고 발심을 하여서 부처님께 구족계를 받고, 시타림이라는 수풀 속에 거주하며 전진고행을 하였다. 처음에는 부처님의 위용과 법문에 마음이 끌려서 어떠한 고행이라도 하겠다고 결심하고 맨발로 걸어도 보고 사념처관과 오정심관을 하며 어렵게 정진을 하여 보았으나 아니 걷던 걸음을 걸어서 발바닥에서는 피가 흐르며, 가정에 있을 때의 기름진 음식과 부귀영화가 생각나고, 아내 생각이 나서 도저히 출가생활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퇴속, 환가하여 청신자로 있으면서 많은 재물을 걸인에게 보시하여 내세공덕이나 쌓을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하고 속가행장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비구들이 그를 만류하고 붙들어도 기어이 가겠다는 것이다. 마침내 비구들은 부처님께 사뢰기를 “세존이시여 수롱나 비구가 출가고행을 이겨낼 도리가 없어서 퇴속을 하려하오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세존께서는 “수롱나를 이리 데려 오너라”하고 말씀하셨다. 수롱나는 비구들에게 이끌려 부처님 앞에 오자 부처님께서는 “너는 어찌해서 출가하여 오래되지도 아니하였는데 환속하여 너의 집으로 가려고 하느냐? 하자 수롱나는 출가 직전에는 세존의 높으신 법문을 처음 들은 탓인지 번뇌가 가라앉고 마음이 태평해져서 수행을 잘해 보고 싶은 생각으로 남달리 정진을 하였으나 번뇌의 싹이 다시 돋아나고 몸이 피로하여지고 정신이 혼미하여 더 견딜 수가 없어 퇴속을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네가 출가하기 전에 너의 집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하였느냐?”하니 수롱나는 “저의 집이 워낙 부자라 먹고 살기 위하여 고역할 일이 없으므로 취미로서 음류 풍악을 배워 거문고를 잘 타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거문고의 줄이 축 늘어지면 소리가 어떠하더냐?” “거문고 줄이 축 늘어지면 소리가 아니납니다.” “거문고 줄을 바짝 조여서 매었을 적에는 소리가 어떠하더냐?” “거문고 줄을 알맞게 매어놓으면 소리가 어떠하더냐?” “거문고 줄을 알맞게 매어 놓으면 무슨 소리가 자유자재하게 잘 납니다.” “네 말과 같이 거문고의 줄을 너무 조여도 소리가 잘 나지 않고, 줄을 너무 늘어지게 해도 소리가 잘나지 않으며, 알맞게 조여야 모든 소리가 잘 나듯이 출가수행자도 또한 그리하여 너무 어렵게 정진을 하여도 염증이 생기고, 너무 놀고 있어도 해태심이 나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니 완급의 중간을 취하여 중도로 수행을 해 보아라.” 하셨다. 그래서 수롱나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 퇴속할 생각을 버리고 불완불급하게 수행에 정진하여 필경에는 아라한과를 얻게 되었다.
불교의 정진으로 중국에 제일 먼저 들어온 42장경에도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물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가되 두 언덕에 걸리지도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건져내기도 아니하고, 뱅뱅 도는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또한 부패하여 썩지도 아니하면, 나는 이 나무가 반드시 바다에 이르리라고 보증하나니라. 이것과 마찬가지로 도를 배우는 사람도 정욕에 미혹한 자가 되지 아니하고, 양편 극단에 어지러워지지도 않고, 무위도를 정진하면 나는 이 삶이 반드시 도를 얻으리라고 보증하리라”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중도 사상인 것이다.  

대한불교 무량종 지리산 칠보정사
효종 혜안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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