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신앙

 

신앙이란 우리말로 믿음이란 뜻이다. 믿음이란 넓은 뜻으로도 볼 수 있고, 좁은 뜻으로도 볼수가 있다. 신이나 부처님을 믿는 것은 좁은 뜻이요. 인간 전반에 대한 신용과 신의 같은 것은 넓은 뜻의 신앙이라 하겠다. 흔히 말하기를 세계 인류를 따져 볼 때 종교를 가진 이보다 갖지 않은 이가 더 많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과 신에 대한 좁은 뜻의 믿음만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인류전체를 넓은 의미로 분석해 본다면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존재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사람의 마음은 가을 하늘의 엷은 구름과도 같거니와 자신인들 어찌 믿으리요’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만은 믿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심정일 것이다.
사람들이 타인과 금전 거래를 하거나 어떠한 청탁을 하다 손해를 보거나 사기를 당하고 통탄할 때 이웃 사람이 왜 그런 사람과 거래를 하고 청탁을 하였느냐고 하면 대답하기를 ‘내 마음과 같은 줄 알았지 누가 그런 줄 알았소’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속이기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누가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선천적으로 간악한 성품을 가진 자가 갚을 것도 갚지 아니하고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대게가 그런 것은 아니다. 금전이라든가 물질이라는 그 자체가 본래 본성이 없어서 사람의 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막혀서 돌지 아니할 때 한 사람의 거짓말이 열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금전이란 자체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다.
신의와 양심과 도덕은 인간 최고의 가치인 만큼 누구나 지켜야할 덕목이다. 그러므로 비록 도둑 집단에서조차 그들이 남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는 불의를 저지를 망정 그들 나름대로는 내부에서 서로 지켜야하는 양심과 도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을 한 장물 분배의 공평과 병이 들면 구원하고 죽게되면 매장하며, 서로 없으면 유무를 상통하고, 잡더라도 공모자 밀고치 않는 등 상호간에 부조하는 의리와 도덕이 있기 때문에 서로 믿고 안심하여 범죄를 함께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중의 하나가 그러한 나름대로의 의리와 도덕을 어길 때에는 법에 호소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 단체에서 재판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도 그렇거니와 하물며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야 어떠하겠는가. 이것을 보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겠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니 믿음은 사회를 건설하고 의심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의심하고, 자식이 부모를 의심하고,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고, 아내가 남편을 의심하고, 형제가 서로 의심하고, 백성이 정부를 의심하고, 정부가 백성들을 의심하게 되면 서로 믿고 살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6·25 한국전쟁 때 겪어본 일이 아닌가. 소위 공산주의 치하에 몇 달간을 지낸 당시야말로 질식의 시대요, 지옥의 시절이었다. 만일 그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었다면 그들이 우리를 죽이기 전에 우리들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공산치하에서는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공포에 떨다가 병 등을 얻어 죽거나, 절망하여 자살하는 이도 많았을 것이다 불행한 살생이 얼마나 많았으며, 웃지도 울지도 못할 비극이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면 그들도 사람인데 어찌하여 그토록 무자비하고 몰인정하며, 악독하였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사상의 차이 때문이다 유물론에 눈이 멀어서 온전한 정신을 가지지 못하고 양심이 마비된 사람이 그들인 것이다.
제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무슨 믿음이 있으며, 미친 사람에게 무슨 도덕이 있겠는가. 따라서 공산치하는 지옥이요, 자유대한은 극락이라 비유된다. 일시라도 마음 놓고 살수가 없는 곳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하루 빨리 남북통일이 되어서 북한 동포의 지옥고를 건져주려는 것이 우리 자유민의 이념이요, 기원이라 하겠다.
『열자(列子)』의 「천서편(天瑞篇)」에 나오는 이야기로 옛날 중국의 기나라에 어떤 사람이 주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두려워하며, 근심하여 침식을 전폐하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쓸데없는 근심 걱정을 하는 것을 가리켜 기우(杞憂)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뒤집혀질 것을 걱정한다면 한시라도 마음을 놓고 살수가 있겠는가. 이태리나 일본 같은데서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지진이 일어나서 지축을 흔든다고 하며, 어쩌다가 큰 지진이 일어나면 몇 천명씩 죽는 참사가 생기지만 국민들은 그러한 참사가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물건을 주고받는 대차관계에 있어서도 상대자가 오늘 죽을는지 내일 죽을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찌 거래를 터놓고 방심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의 연령으로 보나 신용으로 보아서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서로 거래를 터놓고 주고받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은 의식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다른 사람들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영국에 베이컨이라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저 개를 보라 저 개들이 사자를 잡는 것은 저의 등뒤에 사람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개 이상의 힘을 발휘하여서 사자를 잡는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등뒤에 신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사람이상의 힘을 발휘하여 위대한 영웅이 되고 대종교가와 대 정치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의 백인들이 인도를 점령하고 있을 때 사자 사냥을 하는데 불독과 같은 사나운 개를 사용했다고 한다. 영국 사람이 인도를 점령한 뒤 가장 난관으로 여겼던 세 가지가 바로 사자와 뱀과 모기였다. 인도는 열대지방으로 도처에 뱁이 많은데 그 몸통의 굵기가 멍석을 말아 놓은 것과 같고, 나무 위에 몸을 칭칭 감고 있다가 나무 밑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머리를 축 늘어 뜨려 통째로 삼켜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사자와 호랑이가 많아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모기에 물려서 말라리아 등의 열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백인들은 정글에 총을 마구 쏘면서 뱀과 맹수와 싸우기를 십 년이나 계속하였다 한다. 그런데 백인들이 사자를 사냥할 때에는 원주민들로 하여금 사자가 있는 굴을 탐지케 하고 그 뒤에서 토벌을 나가는데 그 선봉에 불독 등의 맹견을 수 십 마리씩 앞세우고, 그 뒤에 백인들이 장총을 들고 간다는 것이다. 목적지에 이르러 개떼를 격려하여 사자가 있는 굴속으로 돌진하게 하면 평소엔 사자를 보기만 하여도 질겁을하고 도망을 치던 개들이 사람이 등 뒤에서 물으라 하고 응원하는 바람에 지상의 천구로 변하여 사자를 물어뜯고 싸운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나운 사자이지만 수 십 마리의 개떼가 전후에서 덤비고 물어뜯기 때문에 얼이 빠지게 되고 이럴 때에 원주민들이 창으로 사자를 찔러서 잡는다는 것이다. 물론 원주민들이 잡지 못할 때에는 백인들이 총으로 쏴서 잡게 된다. 베이컨의 말은 이와 같은 사냥을 비유하여 자고로 위인과 철인들이 있을 수 있던 것은 그들이 신을 믿기 때문이며, 마치 개가 등 뒤에 사람이 있음을 믿고 개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만일 사람에게 믿는 믿음이 없으면 사공 없는 배를 탄 것과 같고, 마부가 없는 마차를 탄 것과 같아서 가는 곳마다 구렁에 떨어지고 참호에 빠지느니라,’라는 말씀이 경전에 있으니 인간의 신앙은 빈 배에 사공을 가진 것과 같고, 노인과 장님의 지팡이와 같으며, 어두운 밤길의 등불과 같은 것이다. 또 인간으로서 신앙심이 없다면 향기 없는 꽃과 같고, 불이 꺼진 화로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미라, 일체의 모든 선법을 키우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신앙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력 신앙이요, 다른 하나는 타력신앙이다. 자력신앙이란 자기의 의지와 마음을 믿는 것이니 불교경전에 보면 불심종인 견성성불의 선종과 같은 것이요, 타력신앙은 하나님 같은 신과 아미타불과 같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니 기독교나 흰두교, 불교에서 보면 염불종인 사후 왕생을 말하는 정토종과 같은 것이다.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을 비유하면 어두운 밤에 도적이 많고 맹수와 귀신이 나타난다는 어떤 험로를 가게될 때 권총이나 칼이나 몽둥이 같은 무기를 휴대하고 그 위력을 믿는 것이니 타력신앙이요, 인간의 생사에 대하여 달관하고 체득하는 것이 자력신앙이다. 그러므로 강한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하고 약하고는 체력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심력의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운이 세고 체력이 강한 자는 자기의 완력을 믿고 아무 사람에게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업신여기지만 체력이 약한 자는 강한 자와 잘못 겨루다가는 뼈를 추리지 못할 줄 알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상대방의 급소를 쳐서 절반이상 죽게 만들거나 아주 죽여 버리고 마는 것이다. 싸움을 할 때도 강자보다 약자가 더 무섭고, 남자보다 여자가 더 치명적인 법이다. 그러니까 약자를 더 사랑하고, 여자를 더 어렵게 여겨서 존경하고 위해주고 사고가 없는 법이다. 인간의 모든 사고는 흔히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짓밟으려고 하는 약육강식에서 비롯된다.
인생에 있어서 신앙은 강한 힘을 주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들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요. 언덕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사람은 풀뿌리 하나라도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심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저마다 달관을 못하는 이상 타력신앙에라도 의지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그로 인해 자연히 우리 주위에는 미신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 보살이 외손자 돌잔치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중도에 탁수가 흐르는 냇물을 만났다. 물이 과히 깊지는 않았지만 늙은 몸으로 치마를 걷고 지팡이를 짚어 건너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가 떨려서 더 이상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중류에 들어섰는지라 되돌아 나올 수도 없이 일심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니 흩어진 정신이 통일되고, 긴장되어서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러나 둑에 올라서자마자 관세음보살도 잊어버리고 냇물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그래도 늙은이가 이물을 건넜구나, 아직도 내가 기운이 웬만하구나,’하며 자기의 힘을 탄복하였다. ‘관세음보살이 건너 주었나? 내 힘으로 건넜지,’하고 중얼거리며 딸의 집에 가서 외손자의 돌잔치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중간쯤에 이르자 역시 다리가 떨려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냇물을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력신앙이 철저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이 타력신앙이라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력신앙이라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돌, 바위나 잡신이나 나무 같은 것을 믿는 것보다는 위덕과 감회가 깊은 석가여래나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나 관세음보살 같은 분을 지성으로 믿고 그 명호를 생각하며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리하면 불가사의한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자력신앙은 자기 마음이 곧 부처요, 진리요, 온 우주 만물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를 가장 간결하게 의심하여 참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성불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한불교 무량존 지리산 칠보정사 
효종 혜안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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