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에 대한 고마움

 

정말 죽을 만큼 삶이 지치고 힘들 때 가까운 화장장을 가보라. 불속에 들어가는 주인공은 뜨거워도 뜨겁다 소리 지르지 못하며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다. 과연 편안해 보이는가. 화장장의 화구(火口)의 온도는 최고 1200도 까지 올라간다고 들었다. 죽지 않고서는 그 뜨거운 온도 속으로 뛰어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상 일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불 속보다 덜 뜨겁다. 이승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마다 “저 1299도 불 속보다 낫지”하면서 위로하면 다시 지금의 삶에 충실할 수 있다.
절망스러운 상황이 오더라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 그 어떤 일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종 눈 뜨고 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지낸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오늘 하루”의 값어치는 어떤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시인 소포킬레스는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바라던 하루다”라고 말했다. 하루는 쓰는 사람에 따라서 그 가치는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우리에게 허락 된 하루는 천년의 시간과 같다.
어제 하루 동안 수 없는 우리의 이웃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루를 더 살고 싶었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하루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자는 없으리라. 어제 유명을 달리한 그 사람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하루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설령 모든 걸 다 잃었다하더라도 목숨하나 보전하고 있으면 절반은 남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머지 절반은 살아가면서 채우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이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한 축복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사느냐는 그 다음 문제다. 확실한 것은 저 차디찬 땅 속에 망자(亡者)의 이름으로 누워있는 것 보다는 훨씬 행복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하면 해결의 답이 있다.
어떤 아이가 세배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동전 한 냥을 줍게 되었다. 이 아이는 새해 첫날부터 돈을 주웠으니 대단한 행운이라 여겼고, 그 행운이 일 년 내내 지속되길 기대하였다. 그 후부터 이 아이는 걸을 때마다 계속 땅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결국 그것이 버릇이 되어서 죽을 때까지 땅바닥만 쳐다보고 살았다. 몇 백 개의 동전은 주웠을지는 몰라도 인생에서 소중한 부분을 더 많이 놓친 것이다. 푸른 하늘도 마음껏 올려다보지
못했으며 길가에 핀 꽃들의 아름다움도 보지 못했다. 이를 테면 인생의 소중한 기쁨과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살아가는 일에는 중요할 때가 많다.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황금처럼 쓰기 위해 살아야 한다. 실존의 순간을 놓치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 숨 쉬고 있는 지금이 훨씬 소중하다는 뜻이겠다. 저승이 아무리 좋다한들 이승의 가시밭길보다 편하리란 보장이 없다. 눈감고 죽으면 아무 소용없다.
겨울 한파(寒波)가 매서워도 봄은 찾아온다. 한 치 앞이 안보일 만큼 어둠이 깊어도 새벽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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