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실다워야 과일도 실답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출세 지향적인 교육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은연중 최고만을 선호하는 습성에 젖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더 크게, 더 높이, 더 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된 것이다.
물론 뜻을 세우는 것은 보람 있는 인생의 출발 조건이다. 입지가 분명한 삶은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대로 사는 것보다는 한결 값진 것만은 틀림없다. 이왕 뜻을 세울 바에는 크고 높게 잡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뜻이 크면 그만큼 마음의 부대낌과 육체의 노고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선인들은 한결같이 안분지족의 삶을 얘기했다. 
현실에 안주한다는 뜻보다는 과욕을 경계한 것이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여 지나친 욕심은 삶을 망치는 근본임을 강조해 온 것이다.
문제는 어떤 뜻을 세우느냐와 그것의 실천 방법에 있다 하겠다. 뜻을 세우되 참답게 세우고 뜻을 이루어가되 실답게 추구하라는 것이다. 딴에는 원대한 목표라고 세운 것이 망상이나 몽상에 불과함을 우리는 경험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다운 뜻을 세운다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곧 주제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입지의 주제가 불분명하고서 어찌 뜻이 바르기를 희망할 수 잇겠는가. 결국 바른 뜻이라 함은 ‘나는 누구인가’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참구하는 일이다. 아무리 고원한 뜻이라 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체 세운 것이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로 참 나를 발견하는 것, 거기에 뜻을 두는 게 참된 입지라 할 것이다. 나를 알고 나면 세계의 실상도 저절로 알게 되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이렇게 뜻만 잘 세우면 길은 환하다는 것이다. 나무가 실다우면 과일도 실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길을 닦아 놓으셨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 길을 열심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활짝 펴고 새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다. 올 한 해 추구하고자 하는 뜻이 올바른 것인가를 진지하게 살펴야 할 때를 맞고 있다.
대한불교 무량종 
지리산 칠보정사
효종 혜안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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