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치의 계절을 맞으며…

신사는 정치와 종교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서양의 속담이 있다. 부지중에 격정적 어조로 흘러 시비를 벌이기 쉽고 주먹다짐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선 때가 되면 우리 사회에서 흔히 목도되는 현상이다. 
별 생각 없이 정치적 소견을 얘기했다가 택시에서 하차해야 했다는 경험담은 진귀한 것이 아니다. 그런 정치의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각종 매체가 예상 후보자의 지지율을 대서특필하는가 하면 역대 선거 때 지지율과의 비교 수치를 보여 준다.
후보자의 지지율이나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지지도 조사를 접할 때마다 상서롭지 못한 예감을 갖는다. 극단적인 널뛰기 현상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때나 국민의 정부 때나 초기엔 90%까지 올라갔다가 말기엔 10% 전후로 곤두박질 쳤다. 
탄핵이 거론 될 무렵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도는 20%정도였다. 탄핵 소추안이 통과한 후의 지지도는 80%가 넘는 경우가 있었다. 요즘의 지지도는 말할 것도 없다. 극단적 널뛰기 현상은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사자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국민에게도 문제가 있다. 열정적 기대와 그 반작용으로서의 실망을 감안하더라도 지지도가 10%와 90%, 또는 20%와 80%를 오르내리는 일은 정상이 아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논리적 모순에 찬 언사에 추풍낙엽처럼 굴러가서 탄액 소추안 발의자를 역적 취급한 것은 기괴한 일이다.
국회의원도 외국인 노동자나 관광객이 아닌 우리 국민이 뽑았다는 사실은 완전히 지워졌다. 
전란 이후 우리 국민은 과도히 긴장된 생활을 해왔고 그것이 집단적 정서불안 상태를 야기한 측면이 있다. 극단적 널뛰기 현상은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음해성 전락이나 깜짝쇼나 한탕주의가 효험을 보는 것도 이런 증상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집단적 히스테리를 교정하지 못하는 한 우격다짐의 궤변이나 무책임한 선동가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사태를 극도로 단순화하는 폭력과 증오의 언어가 걸핏하면 정치인 입에서 나오고 있다.
정치의 계절에 임해서 떠오르는 반면 교사적 장면이 있다. 책을 보았건 영화를 보았건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시저를 암살한 후에 광장에서 브루터스가 시저 암살의 대의명분을 들려준다. 군중은 ‘브루터스 만세’라는 환호성으로 응답한다.
곧이어 시저의 시신과 더불어 안토니가 등장 한다. “내가 온 것은 시저를 묻기 위해서이지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저지른 행악(行惡)은 사후에도 살아남지만 선행은 뼈와 함께 땅에 묻힙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선동연설은 결국 브루텃의 집에 불을 지르자는 서민의 함성으로 이어진다. 안토니는 시민의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호소해서 자기가 원하는 감정적 반응을 교묘히 유도한다. 브루터스 연설의 논리 정연한 명분론과 대조가 된다. 광장에서의 선동적 대중 조작(操作)의 결과는 시민의 폭도화(暴徒化)다.
이성적 판단 없이 감정과 집단 심리에 휩쓸리는 군중은 쉽게 증오를 조장하는 야심가의 조작 대상이 된다. 조금 전의 브루터스 만세가 곧 타도로 이어지는 집단 히스테리 증상은 민주사회의 근간을 뒤흔든다. 
집권초기에 80%의 지지율을 기록하다가 말기에 지지율이 하락하는 대통령은 결국 국민의 합작품이다. 국민의 불행이기도 하다. 다시 불행한 국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필코 총명해야 한다는 시민적 책무를 사려 깊게 이행하는 도리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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