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아름다운 학교

 

이솝 우화 속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개미와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베짱이가 개미에게 구걸을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편하게 살려면 개미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 우화는 놀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베짱이처럼 살다가는 머지않아 거지 신세가 된다는 협박(?)에 곧잘 동원된다. 개미와 베짱이 일화다. 2000여년 전 그리스의 한 노예가 만든 이야기가 한국에서 이토록 맹위를 떨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 우화가 학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지금 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이성 모두 참고 견뎌라 그러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좋은 날’은 이른바 ‘SKY’로 부르는 서울의 명문이나 지방의 ‘좋은’ 학과에 진학하는 일이다. 사실이 그렇다. 일단 좋은 대학, 좋은 학교에 진학하면 돈, 명예, 이성이 고구마 줄기처럼 뒤따라온 것이 그간 한국사회의 실정이다.
그런데 이런 물음을 따라가 보자. 왜 개미는 그토록 죽어라 일만 했을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잘 먹고 잘사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사회에 만연한 ‘개미 형 인간’들은 즉각 이렇게 답한다. “힘들여 일하지 않고 즐겁게 노는 것”이라고, 그런데 어떡하나 베짱이는 여름부터 그렇게 살았는데.
하지만 우리는 한 여름 개미처럼 일하지 않고서는 행복한 겨울은 없다고 확고한 신념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그 믿음이 바로 우리의 교육현장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이는 “유예된 행복”이다. 명문대학을 가기 위해 학창시절의 행복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철칙이 오랫동안 우리의 교육현장을 옥죄고 있다.
물론 명문대 진학을 위해 한 순간의 고통은 얼마든지 감내하겠다는 학생들이 많다. 문제는 공부를 하든 그렇지 않든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우리의 개미 찬양 이데올로기가 “공부는 불행”이라는 등식을 심어준다는데 있다. 학생들은 당연히 배워야 하며 배움의 과정은 세상 그 어떤 일보다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심지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며, 요즘 아이들 말로 “망언”을 서슴치 않는 전교 1등의 우수학생까지 공부는 불행한 노역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외친 공자님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불행으로 바뀐 이유는 바로 “행복 유예”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 때까지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온다는 식의 대한민국 교육방식은 진정한 공부가 아니며 행복도 아니다. 설령 명문대를 진학한다 해도 유예된 행복이 지불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는 또 다시 “유예된 행복”이 기다릴 뿐이다. 진정 아름다운 학교는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학교여야 한다. 대학 진학 때까지 행복을 유보하고 친구를 적으로 삼고 순위 경쟁에 목메는 학교와 공부는 허상(虛像)이다. “과거는 지나갔으며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오직 남은 것은 오늘 뿐”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우리학교가 지녀야 할 참 교육상이다. 대학에 합격하면 그때부터 인생을 즐겨도 늦지 않다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한다, 지금 이 공부가 최고의 행복임을 알도록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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