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낭비한 죄

밤늦은 시간에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는데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 나왔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곁에 있어 주세요~.’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7080세대에 가까울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 들었던 듯한 이 노래를 열창하는 가수나 따라 부르던 중장년 방청객들의 얼굴 모두에서 숨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무심결에 흥얼흥얼 나도 따라 부르다 문득 추억 속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한밤중 소파에 누워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나들이한 옛 가수들의 흘러간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시곤 하던 어머니, 그 얼마 전 모습과 지금 내 모습이 어느덧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도 깨알 같은 글자들이 조금씩 어른거려 보이고 어깨가 결리기 시작하는 나이였을까. 새삼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명치끝에 얹힌 가슴이 뻐근해진다.
나이가 찰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것인가. 올 한 해 잘 해봐야지. 이런저런 다짐과 약속을 한 게 어제 같은데 몇 개월이 지났다. 속절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바닷가 모래와도 같은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은 역시 그 옛날 보았던 영화 ‘빠삐용’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진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빠삐용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외딴 섬에 유배돼 처절한 나날을 보낸다. 이 영화에서 내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큰 죄는 바로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대사였다. 아무리 영화 속이라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인생 내가 낭비한 것이 그처럼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설정에 아연했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하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삶을 허송하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를…. 그 죄는 단순히 내 삶을 낭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음주운전처럼, 내가 잘못 살면, 나를 위해 주고 아끼는 사람들의 가슴이 무너질 것이다. 조직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죄의 파장은 더욱 커질 것이다. 나로 인해 영향 받는 사람이 그 만큼 늘어나는 것이므로,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국민의 호의를 낭비한 죄’ ‘국민의 꿈을 탕진한 죄’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삶을 똑바로 제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곧 나를 위하고 가족과 이웃을 위하고 국가와 민족까지 위하는 길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살아야 ‘내 인생을 낭비한 죄’에서 ‘유죄 선고’를 피할 수 있을까. 92년의 일생 동안 하루 평균 그림 7점을 그려냈다는 피카소처럼 살아야 하나. 그는 60세에 석판기술을 배우고 70세가 되어서는 도공이 되는 등 평생을 쉼 없이 스스로를 개조하며 살았다. 그의 마지막 걸작품은 결국 그 자신의 인생이었던 셈이다. 나보다 몇 살 위인 빌 게이츠는 10년이 넘도록 세계 1위 부자로서, 그 엄청난 재산을 남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고 이제 자기 재능까지도 사회에 바치겠다고 했다.
이들이 보여준 삶의 텍스트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이 따라하기에는 너무 높은 경지에 있는 듯해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곰곰 생각한 끝에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으로 내린 결론은 너무 소박했다.
‘내가 몸담은 현실에서,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힘 다해 하는 것’ 여러분은 어떤 결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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