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화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화를 안고 사는 것은 독을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화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을 닫히게 한다.따라서 화를 다스릴 때 우리는 미움, 시기, 절망과 같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며, 타인과의 사이에 얽혀있는 모든 매듭을 풀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눈 돌리면 화나는 것투성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화를 안고 살아간다. 일상적인 감정 중 화는 기쁨, 슬픔, 즐거움, 두려움보다 현대인의 마음속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 그 원인으로는 타인관의 부딪힘이나 욕구에 대한 불만족, 과다한 경쟁, 잦은 스트레스 등을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먹는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닌 하나라 했다. 몸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몸이다. 그러므로 몸의 병이 마음의 병이 될 수 있고, 마음의 병 또한 몸의 병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화를 내거나 절망할 때, 혹은 폭력적인 성향으로 변할 때 거기에는 먹는 음식이 큰 영향을 미친다. 분노와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먼저 식사와 소비의 전략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식사는 문명의 한 단면이다. 우리가 음식물을 재배하는 방식, 우리가 먹는 음식의 종류, 그리고 그것을 먹는 방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명에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더 평화롭고 덜 고통스러운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마음에 화가 일어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 화가 들어 있는 음식이 많은데, 그럴 때 우리는 화를 먹는 셈이다. 따라서 그것을 먹고 난 다음에는 그 화를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음식을 잘 살펴서 먹어야 한다. 가령 광우병에 걸린 소의 고기를 먹을 때 그 고기에는 화가 들어 있다. 계란이나 닭고기에도 엄청난 양의 화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요즘에는 닭이 최신 시설을 갖춘 대규모 농장에서 사육된다. 닭은 걸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고 흙속에서 먹이를 찾아 먹지도 못하며, 순전히 사람이 주는 모이만을 먹고 자란다. 비좁은 우리에 갇힌 채 전혀 움직일 수도 없고, 밤이나 낮이나 늘 서 있어야 한다. 걷거나 뛸 자유가 없는 상태를 상상해보라. 밤낮없이 한곳에서 꼼짝도 못하고 지내야 하는 상태를 상상해보라 틀림없이 미쳐버릴 것이다. 당연히 닭들도 미쳐버린다.
 닭이 알을 더 많이 낳게 하려고 농부는 인공적으로 밤과 낮을 만들어 낸다. 인공조명을 이용해서 낮과 밤의 길이를 자연보다 짧게 만든다. 그러면 닭은 그새 하루가 지난 것으로 믿고 또다시 알을 낳는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하는 사이 닭은 결국 엄청난 화와 좌절과 고통을 안게 된다. 닭은 그 화와 좌절과 고통을 다른 닭을 공격함으로써 표출한다. 닭들은 서로를 부리로 쫀다. 그래서 피를 흘리며 죽는 닭이 많아진다. 그러면 농부는 서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닭의 부리를 잘라버린다.
그런 닭이 낳은 계란을 먹을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되고 화를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한 닭이 낳은 행복한 게란을 먹어야 한다. 화가 난 암소에게서 짠 우유를 마셔서는 안 된다. 순리대로 자란 암소에게서 짠 유기 우유를 마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농부들이 가축을 더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기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채소 역시 유기적으로 길러진 것을 사 먹어야 한다. 값은 더 비싸지만, 대신 적게 먹으면 된다. 우리는 적게 먹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서 화를 먹을 뿐만 아니라 눈과 귀와 의식을 통해서도 화를 받아들인다.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행태도 화와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화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소비의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잡지에서 읽은 것이나 TV에서 보는 것 또한 독성을 품고 있을 수가 있다. 그것들도 화의 좌절을 내포하고 있다. 화가 가득한 소고기로 만들어진 비프스테이크와도 같이 영화에도 화가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런 영화를 보면 우리는 곧 화와 좌절을 받아들이는 샘이 된다. 신문기사나 타인과의 대화 같은 데도 많은 화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살다 보면 우리는 더러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한 시간쯤 얘기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말이 품고 있는 엄청난 양의 독성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들어오기도 한다. 그리하여 엄청난 양의 화가 우리 몸에 흡수되고, 나중에는 필시 그것을 표출하게 된다. 모든 형태의 소비를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방송에서 뉴스를 들을 때 신문기사를 읽을 때, 어떤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마치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 음식이나 먹는 것처럼 하지는 않는지 늘 유의해야 한다.                    
탁닛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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