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나무처럼 여여하게

 

꽃이 만발했는가 했더니 찌는 더위가 찾아왔다. 분주한 일상에 밀려 무심히 지나치는 자연의 모습은 우리가 보든 안 보든 여여하게 흘러 그들만의 규칙에 따라 어김없이 사계절을 장엄하며 섭리에 순응한다. 나무는 그 자리에서 서서 평생을 산다. 간혹 수명이 오래된 나무는 봄이면 잎이 돋고 가을이면 잎이 지며 몇 세대의 사람들이 나고 죽는 삶을 지켜보며 묵묵히 살아간다.
‘쉘 실버스타인’은 소년과 나무를 소재로 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통해 우리네 삶을 노래했다. 나무는 소년에게 그네도 타게 해주고 나뭇잎을 주워 놀게도 하고 사과열매를 주기도 했다. 시원한 그늘도 만들어 주고 배를 만들 수 있도록 나뭇가지를 주고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나무 기둥을 주기도 했다. 모든 걸 다 주고 잘려나간 나무 밑둥은 어린 소년이 늙어 마을로 돌아왔을 때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되어 주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나무의 무한한 희생이 아름답게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네를 타고 나뭇잎을 주우며 놀던 천진무구한 소년이 어느새 늙어 나무 밑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허망한 모습이 눈에 그려질 것이다. 실로 무심한 삶이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구하는 무언가를 찾아 열심히 살아간다. 때론 삶의 전부인양 그게 아니면 인생이 무의미한 것처럼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전력질주하기도 한다. 하나씩 성취했을 때마다 만족감을 느끼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은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는 갈망 속에 삶을 바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나아가는 삶, 향상되는 삶을 보장해 주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2% 부족한 무언가가 우리들 마음속에 있다.
더러는 삶이 뜻하는 바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어 우리는 낙심하기도 한다. 때론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며 세상을 탓하고 남을 탓하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항상 고뇌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주어진 상황이 순조로우면 그런대로 살고자 하는 방향대로 살아갈 수 있겠지만 때론 비바람을 만나고 태풍을 만나기도 한다. 악천후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탱하는 나무처럼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내를 필요로 할 때가 참 많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인류의 영원한 과제이자 우리 자신의 절실한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빅뱅 이후 시작된 지구의 역사 이전에 이미 우리의 마음은 있어 왔다고 말한다. 그 마음자리는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마음이며 삼라만상 모든 걸 만들어 내는 진리라고도 말한다. 
부모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지금 현재 이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라도 거슬러 올라가면 수많은 겁을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왔을 것이며 어떠한 모습으로 되돌아 갈지도 알 수 없다. 
무언가를 갈구하며 때론 치열하게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귀로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더 크고 넓게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며 가야할 곳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 아닐까. 거짓을 만들어 내는 것은 세상이 아니다. 사실은 사람이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세상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계절이 오면 잎이 피고 낙엽이 지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여여하게 살아간다면 허망한 우리네 심정이 다소 위안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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