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는 곧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곧 타인이다. 아들 때문에 화가 난 어머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아들이 곧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아들이 곧 나다. 유전적으로 생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아들은 나의 연속이다. 이것은 진리다. 어머니는 누구인가? 우리의 어머니는 곧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후손으로서 어머니의 연속이고, 어머니는 조상으로서 우리와 연속이다. 어머니는 조상과 우리를 이어주고, 우리는 어머니를 후손과 이어준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나는 같은 물줄기에 속해 있다. 어머니와 아무 상관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자식을 잉태한 어머니는 이것을 통찰한다. 자식이 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서 먹고 자식을 위해서 마시고, 늘 자식을 보살핀다. 자신을 보살피는 것이 곧 자식을 보살피는 것이다. 자식이 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는 매사에 조심한다. 그러나 자식이 태어나고 자라서 열두어 살이 되면 그 통찰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자식과 별개인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관계가 서서히 멀어진다. 관계를 개선할 방법을 알 수가 없고, 싸운 뒤에는 좀채로 화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틈이 커지고 견고해진다. 관계가 매우 험해지고 갈등이 깊어진다.
분노는 두 사람을 완전히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만든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두 사람은 아직도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둘이 화해하고 평화를 되찾는 것은 각자가 자신과 화해하고 평화를 되찾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벌을 주는 것은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면 곧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할 때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님을 통찰하면 우리의 복과 고통도 우리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나의 고통이 곧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이다.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그것을 통찰하면 우리는 남을 비난하거나 응징하려는 심정의 유혹을 떨칠 수 있다. 그리고 훨씬 더 지혜롭게 행동할 것이다. 그 지혜는 깊은 사고가 맺어준 결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경전을 읽을 때, 자식이나 배우자가 곧 우리 자신이라는 깨달음을 거듭 상기하게 된다.
경전을 읽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에 흠뻑 젖는다. 우리가 직접 쓴 우리 마음의 경전은 나와 남이 하나라는 사실을 통찰한 데서 나온 것이다. 반야심경은 지혜에 관한 글이다. 우리 마음의 경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홀로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상기시켜주고, 우리에게 사랑의 지혜를 상기시켜준다.  화가 났을 때, 우리가 홀로 존재하는 생명이라는 그릇된 믿음에 빠졌을 때, 우리 마음의 그 경전을 읽으면 우리는 곧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 통찰이 우리 안에 있으면 부처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안전하다. 그럴 때 우리는 더는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화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 가장 깊은 위안을 얻는 길이다. 이 점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늘 자각하면서 살 때 누구나가 실감할 수 있는 현실이다. 그 통찰이 나와 타인들 사이에 평화와 조화를 되찾아준다. 우리는 누구나 평화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살아갈 방도를 모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와 우리는 자신에게 평화와 조화를 안겨줄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자신과 평화 조약을 맺어야 한다.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갈등 때문에 삶이 와해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고 통찰이 없을 때 우리는 자신과 전쟁을 한다.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자신과의 평화와 조화를 복구할 수 있고, 타인들과의 관계도 원활히 할 수 있다. 내 안에 평화와 조화가 있으면 남들도 그것을 알아본다. 그리하여 그들과의 사이에서도 이내  평화와 조화가 회복될 수 있다. 내가 남에게 즐거운 사람이 되고, 상대하기 편한 사람이 되며, 따라서 남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남을 도우려면 먼저 자신과의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자신을 돕는 것이 곧 남을 돕기 위한 최우선 조건이다. 자아라고 하는 환상은 어서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화에서 벗어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타인들까지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한 수련의 요채다.


 

저작권자 © 서대문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