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

 

블랙코미디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끔찍하거나 병적인 풍자로 된 희극’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웃음을 주긴 주되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코미디란 뜻이다. 블랙코미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극 중 장치는 ‘풍자’이다. 인물의 행동이나 대사를 통해 특정한 사건이나 역사적 배경을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이 1964년 초에 만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블랙코미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명작이라 할 수 있다.먼저 이 영화는 전형적인 희극의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 희극의 특징은 정상적인 상황을 비정상적으로 비틀어 버리는 것이다. 광기 어린 망상에 빠진 공군 사령관 리퍼는 순전히 혼자만의 의지로 소련에 핵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현실에서 일개 공군 사령관이 독자적으로 핵 공격을 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큐브릭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여기에 영화의 희극적 요소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큐브릭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을까? 아마 그가 의도한 것은 인간 사회와 부조리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인간들의 불안한 모습일 것이다. 그는 관료주의와 편협함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을 냉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편으론 우스광스럽고 또 한편으론 위태로움을 간직한 전략폭격기가 소련땅으로 날아가는 동안, 대통령은 소련 서기장과 함께 상황을 분석하면서 파국을 막고자 노력한다. 여기에 맨드레이크 대령의 필사적인 노력이 보태져서 마침내 폭격기들에 철수 명령이 하달된다. 그러나 단 한 대의 폭격기에만은 이 명령이 하달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이 폭격기는 모든 통신수단이 고장 나고 말았다. 폭격기는 점차 소련 땅으로 날아가고, 여기에 소련이 비밀리에 개발한 ‘최후의 병기’가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폭격기 기장이 핵폭탄 위에 올라탄 채 휘파람을 불며 지상으로 낙하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비장하다. 영화의 엔딩 또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핵폭탄이 터지고, 버섯구름이 피어나는 엄혹한 상황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멜로디, ‘우리 다시 만나리라’라는 노랫말이 풍기는 냉소는 그 얼마나 비극적인지.
일본의 핵 오염수 투기가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차후에도 원자력 발전소 보유국에서 이런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크다. 지금 일본은 위험한 선례를 남기는 것이다. 일본에서 바다로 방류하는 오염수가 멀리 태평양으로 간다고 해서 우리가 안심할 수 있을까? 결국 지구가 병드는 것이며 우리는 그 지구 위에 살고 있다.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후손들에게 잠시 지구를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 인류가 살기 위해 개발한 원자력 발전소가 결국엔 인류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 되고만 부조리한 상황은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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