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귀와 입사이는 불과 10㎝밖에 안되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천양지 차이다. 똑같은 내용의 말이라 하더라도 말을 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말을 순리적으로 엮어서 이야기하는 사람과 자신만의 정당함, 잘남을 나타내기 위해 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하나는 말의 내용 자체의 믿음과 신용이 깃들어 있음이요, 또 하나는 말을 자기 수단으로 이용하는 편법이기 때문이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자연히 그 속에 남의 험담도 있고, 쓸데없는 말도 많이 들어 있어 나중에 후회가 따른다.
입을 단속하지 못하면 그대로 온갖 화(禍)의 근원이 되고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어담을 수 없다. 아무리 해명해봐야 오히려 실언 내용만 더 부각 될 뿐이다. 특히 상대방의 가슴에 못을 밖는 말은 의도성 없는 실언이라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그런데 어찌 남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고 뒤끝 없다는 것으로 변명 되겠는가? 만약 거기에 뒤끝까지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란 자기의 주관적 개념이 넘쳐흐르긴 하나, 한편으로는 그 대상의 값어치까지 결정 된다.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남을 헐뜯는 일은 그 당시에는 신랄하나 거짓말을 하고 편안해질 이유는 없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말, 자신의 잘못을 먼저 시인하고 타인의 고칠 점을 기분 상하지 않게 표현하는 기술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책과의 만남, 인격 배양, 질서 속의 생활 등이 꾸준해질 때 얻어지는 것이다.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에도 술에 취해 한 말은 술이 깬뒤 후회한다”고 했다.
말은 생각의 골을 드러내 준다. 말이 흐트러지면 사람의 행동도 흐트러진다. 행동이 흐트러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그 질서도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말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산사(山寺)에서도 처음 시작하는 소리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고 한다. 그 다음 경전을 읽든 불공을 드리든 간에 모든 의식이 시작된다.
즉 입부터 깨끗이 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뜻이다. 그래서 몸과 입과 뜻의 삼업(三業) 중 다른 업은 세 가지씩 있으나 구업(입)에는 거짓말망어(妄語), 한 입으로 두 가지로 하는 말, 양설(兩舌), 욕하는 말, 악구(惡口), 비단같이 꾸미는 말, 기어(綺語), 등 네 가지를 나쁜 말로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말에 대한 중요성을 불교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특히 민선으로 선출된 사람들은 구민의 인기를 먹고 살다보니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항상 말을 하게 된다. 말이 자신의 수단이다 보니 말은 많아지고 말이 많다 보면 때론 실수와 오해도 낳게 마련이다. 그래서 말이 침묵보다 나으려면 말의 품위가 요구된다.
사람들의 불행은 모두가 입에서 생기기 때문에 “아침에 입,” “점심에 말,” “저녁에 혀,”를 조심하자.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명심하자.
원망이나 미움을 내려놓고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평안은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아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세상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도 생각하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함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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