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성을 가진 ‘늑대’

에세이

‘배려(配慮)’란 상대방 처지에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일이다. 가령 뛰따라 들어오는 사람에게 문을 잡아주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쑥쓰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런 행위가 뒷사람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고, 그 사람이 고마워한다는 것을 한 번도 교육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뒷사람에게 문을 잡아주는 일을 아이들에게 손쉽게 가르키는 방법이 다. 바로 부모가 자녀와 함께 다닐 때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은 실제로 해 보이는 것이다. 내가 나의 어머니에게서 자식 사랑하는 법을 배웠듯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육은 바로 가정교육이다.
양(羊)은 개(犬) 다음으로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가축으로 못쓰는 부분이 없는 동물이다.
고기는 징기스칸 요리로 대표되는 별미의 재료이고, 양에서 짠 우유는 먼저 음용(飮用)했고, 치즈로도 만들어 먹고, 술을 빚었으며, 털은 옷감 등 최고의 모직물, 그리고 가죽은 우수한 장구(裝具)의 장식구가 도리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는 글을 쓰기 위한 양피지로도 사용되었으며, 10세기 때만 하도라도 이곳에 성경말씀을 썼다고 한다. 또 가축으로서 소와 말에 못지 않은 이용가치가 있어 신(神)에게 제물로 바쳤고, 신의 신성한 동물로서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기독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인 이삭을 희생시켜 번제를 드리라 했다. 아브라함이 이를 흔쾌히 결행하자 그 대신에 재물로 숫양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서찾은 즉, 마침내 찾아내면 이것을 더 기뻐하라고 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한 것보다 기쁨이 더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양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양치는 사람을 목자(牧子)라 한다. 신자를 양에 비유하여 성직자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양의 탈을 쓴 늑대”란 표현을 많이 쓴다. “늑대 성격을 깊숙이 감추고 자신이 양처럼 순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작은 공동체에서도 의인(義人)인양 행동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일인가. 이런 사람들을 골라 이단자로 표창을 추천하면 어떨런지. 아니면 “무지의 극치를 이룬” 사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남자를 홀리는 요염한 여자를 “여우”라고 하고 천년 묵으면 “구미호”로 둔갑한다고 하며, 여자를 탐하는 속성 때문에 남자를 “늑대”라 부른다.
여우는 개과에 속하기 때문인지 여우보다 오히려 늑대가 사악한 악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대가 정당소속 이름이 아니라면 당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대에게 공천을 준 사람에게 얼마만큼 감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신은 자신의 실력 때문에 당선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본 필자가 알기로는 천만에 말씀이다. 그대는 히스테리성 인격이상자인 교대성인격(交代性人格)의소유자가 아니면 타인에 대해 지속적인 불신과 의심을 가지고 원한을 품거나 지위와 권력에 집착이 강한 인격 장애인 편집증세(偏執症勢)의 소유자가 아닌가도 싶다.
참으로 본 필자가 보건데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격리 수용하여 치료를 받거나 활동을 중지하고 집안에 들어 앉아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 마땅할 것이다.
본 필자가 그대가 깔아 놓은 멍석위에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 그대의 알고 있는 것은 둘째 치고, 예의범절, 동료애 등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마저 갖지 못했다. 멀지 않아 그대가 내 뱉은 말이 낫낫이 공개된 후 자신의 쥐꼬리 만한 권력으로도 막을 수 있을런지 의심되기도 한다. 그 후의 걱정이 앞서는 것은 본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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